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인 엄씨 (문단 편집) === 사후 === 귀인 엄씨의 사후, 연산군은 엄씨를 부왕의 후궁으로 보지 말고 그 자식들을 종친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명하였다. 이에 따라 외동딸 공신옹주는 옹주의 직첩을 빼앗기고 아산(牙山)으로 유배를 갔다. 또한, 엄씨의 아버지와 형제들도 모두 연좌되었는데 처음에는 엄회와 엄계를 장 1백 대에 처한 후 변방에 보냈지만, 결국에는 머리를 베었다.[* 연산군일기 62권, 연산 12년 6월 14일 임술 4번째기사.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ja_11206014_004|#]] ] 엄산수 역시 마찬가지로 참형에 처해졌다. 연산군은 엄산수의 뼈를 부수게 하여 뼛가루를 강에서 날리기까지 하면서 능욕하였다.[* 당시 엄산수는 나이 82세로 경국대전에 따르면 연좌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데도 연산군이 경국대전에 따를 수 없다고 하여 연좌되었다. ] 1506년(중종 1)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왕위에 오른 중종이 직첩을 회복시켰고, 예를 갖추어 다시 장례를 치러주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